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문단 편집) == 건문제 충성파 대숙청 - 임오순난([[1402년]])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ang-xiaoru.jpg|width=170]] || || '''[[방효유]]'''(方孝孺) || 연왕 주체는 뭇 신하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명나라 제3대 성조 영락제였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신을 압박하던 정적 황자징과 제태부터 잡아들였다. '''제태'''는 당시 정난군의 기세를 두려워한 건문제 때문에 해임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수도 남경으로 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난군이 승리하자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혀서 죽었다. 제태의 종형제는 모두 죽었고, 숙부들은 변경으로 귀양을 갔으며, 제태의 아들은 6살이라 죽음은 면하고 공신들에게 지급되었다가, 제4대 인종 [[홍희제]] 시절에 사면되었다. '''황자징''' 역시 그 무렵 제태처럼 해임된 처지였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라는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중에, 정난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여기저기를 떠돌며 다시 군사를 일으켜려다가 잡히고 말았다. 원한이 쌓였는지 영락제는 직접 황자징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황자징은 굴복하지 않고 항변했다. 황자징은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에 처해졌고, 족인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인척들은 변경의 수자리로 귀양을 떠났다. 유일하게 아들 한 명만이 이름을 '''전경'''(田徑)이라 바꾸고 살아남았는데, 훗날 사면령을 받았다. 문제는 건문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였다.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는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끊어질 것입니다."''' 라면서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고, 영락제 역시 방효유를 등용하려고 하면서, 천하에 내리는 조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울면서 거부했고, 영락제는 >"선생께서는 자해하지 마시오, 나는 [[주공단|주공]]을 본받아 [[성왕(주)|성왕]](成王)을 보좌하고자 할 뿐이오." 라고 하면서 방효유를 설득했지만, 방효유는 되려 이렇게 물었다. >'''"[[성왕(주)|성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락제는 [[주나라#s-3|서주시대]] 초기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섭정한 이야기처럼, 자신도 천하를 훔치려는 게 아니라 주공 희단처럼 군주를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겠다고 한 소리였지만, 방효유는 '''"그럼 그 [[성왕(주)|성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대답한 것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저기서 말하는 성왕은 바로 건문제였다. 이 물음에 영락제도 당황해서 >'''"불에 타서 죽었다."''' 고 대답했고,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자손을 세우지 않는 것인가?"''' 하고 묻자 영락제는 >'''"장성한 사람이 군주에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하지만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동생을 세우지 않는가?"''' 라고 묻자, 영락제도 >'''"이건 내 집안 일이다!"''' 라고 성질을 내며 붓과 종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방효유는 >'''"난 못한다."''' 라며 그것들을 내던져 버렸고, 결국 빡친 영락제는 방효유를 잡아다 책형으로 죽여버렸다. 죽기 직전에 방효유는 최후의 절명시를 남겼다. >'''"하늘이 난리를 내렸도다! 누가 그 이유를 아는가, 간신이 계책을 얻어 나라를 도모하고 꾀를 쓴다. 충신은 발분(發憤)하여 피눈물이 흘러 내리는데, 이렇게 임금이 죽었으니, 문득 어디서 구하겠는가. 오오, 슬프도다! 거의 내 허물이 아니겠는가!"''' 이때, 방효유가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 >'''(燕賊簒位)''' 라는 글을 써 영락제를 대단히 노하게 만들어 가족과 친척 등의 9족에 친구나 스승, 제자를 포함한 '''[[멸족|10족]]이 몰살'''되었다는 이야기가 대단히 유명한데, 방효유를 처형한 것까지는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가족 몰살은 《명사》 <방효유전>과 《명실록》, 《작중지》(酌中志) 등 명나라 관련 사료에서는 연관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명사》는 후대인 청나라에서 작성한 사서이다.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직계가 아니면 손대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고, 직계도 성인 남자만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노비였다. 그런데 대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도 아니고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일족이 몰살당한 흑역사가 있었다면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청나라에서 당연히 놓칠 리 없다.][* 당장에 성조 영락제의 아들인 인종 홍희제가 방효유의 ''사촌동생''이었던 방효복을 사면했다.[*《明史》(卷141):“仁宗即位,諭禮部:「建文諸臣,已蒙顯戮。家屬籍在官者,悉宥為民,還其田土。其外親戍邊者,留一人戍所,餘放還。」萬曆十三年三月,釋坐孝孺謫戍者後裔,浙江、江西、福建、四川、廣東凡千三百餘人。而孝孺絕無後,惟克勤弟克家有子曰孝復。”]] 현대에서는 부정하는 시선도 있다. 일단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제남에서 정난군을 저지했던 젊은 명장 '''철현'''은 심문장에 끌려오자, 되려 심문장을 등지며 앉아 버렸고, 그 재주를 아까워한 영락제가 >"다시 생각해 보라." 고 부탁했지만 결국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철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락제의 인정과 의리 없음을 큰 소리로 비난했다. 이에 격노한 영락제는 철현의 코와 귀를 잘라 내게 하여 불에 구운 뒤, 철현의 입에 밀어 넣어 먹게 했다. 그리고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철현은 의기양양하게 얼굴을 들고 대답했다. >'''"충신의 고기가 맛이 없을 리가 있나!"''' 결국 건문제에게 충성을 다한 철현은 책형을 당해 죽어버렸다. 죽었을 때의 나이가 고작 37세였다.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대규모 공신 숙청에서 살아남고, 연왕 주체와 처음 맞붙었으나 패배한 '''경병문'''은 이경륭과 달리 투항하지 않고, 도성 남경이 함락된 후 사로잡혀 처형을 당했다. 수차례 정난군을 격파했던 '''성용'''은 남경이 함락되자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탄핵을 받자 자살해버렸다. 주체를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평안'''은, 그 재주를 아까워했던 주체에 의해 목숨을 건져, 주체가 황제로 즉위한 뒤 북평 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년 뒤인 1409년, 상주문에서 평안의 이름을 발견한 영락제가 >"평안이 아직 살아있었는가" 라 주위에 물었으며, 이를 전해들은 평안은 자살했다. 개국공신인 이문충의 아들인 '''이경륭'''은 남경의 성문을 열고 정난군에 항복했지만 명나라 건국에 있어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최고 공신인 서달의 아들, '''서휘조'''는 영락제가 직접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서휘조의 누이가 영락제의 황후 서씨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영락제의 처남이었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락제는 화가 나서 그를 투옥시켰는데, 옥중에서 공술서를 쓸 때 서휘조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아버지에게 개국의 공이 있으니, 공신의 자손은 죽음을 면한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이자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인 [[이탁오]](李卓吾)는, 이 문장에는 동정을 구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고, 영락제를 추대하는 말도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영락제는 서휘조를 죽이지 않았는데, 서휘조가 영락제의 황후인 서씨의 동생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서휘조는 사형은 면하고 가택연금되어 작위를 박탈당한 뒤[* 그러나 영락제의 장인이자 개국공신인 서달의 제사는 계속 지내야 했으므로 서휘조의 아들에게 작위는 계속 이어졌다.] 몇 년뒤에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휘조의 동생인 '''서증수'''(徐增壽)는 위에서 나온 것처럼 영락제에게 내응하려고 했다가 발각된 뒤에 모반 음모를 자백하라는 건문제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형제의 서로 다른 운명이 참 얄궂다.] 가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건문제'''의 최후였다. 불타버린 성 내에서 효민양황후 마씨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황제의 시신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타버렸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유해라도 남는 법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때문에 혹자는 건문제가 지하 땅굴로 도망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6대 영종 [[정통제]] 시절에는 스스로 건문제라고 주장하는 괴인들도 나타났다. 참고로 건문제와 [[효민양황후]] 마씨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있었다. 당시 6살이었던 장남 화간태자 [[주문규(화간태자)|주문규]](朱文奎)는 아버지 건문제와 함께 실종되었고[* 건문제처럼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 마황후처럼 시체가 완전히 불에 탔거나, 건문제가 데리고 탈출했다는 설이 있다.] 1살이었던 차남 윤회왕 [[주문규]](朱文圭)는 목숨은 건졌으나, 이후 '''56년 동안 유폐'''되었다[* 영락제 입장에서는 정통성을 위해서였다. 갓난아기까지 죽였다가는 그가 매우 잔혹하다는 이미지가 남을 수 있고, 이를 반란 세력들이 이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1457년 그의 7촌 조카인 [[정통제|천순제]]에 의해 풀려났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평생을 유폐당해서 그런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된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